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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사회장

이희호 사회장 숙환 별세

여성 인권과 민주화에 헌신한 이희호 여사가 향년 97세 숙환으로 별세했다. 노환으로 지난 3월부터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치료 중 최근 앓고 있던 간암 등이 악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주부터는 혈압이 크게 떨어졌다가 다시 회복되는 위중한 상황이 이어지다 결국 타계했다.

 

부친 이용기씨와 어머니 이순이씨의 6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이화고녀(이화여고)와 이화여전, 서울대 사범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미국 램버스대(사회학과)를 거쳐 스카릿대 대학원(사회학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에는 이화여대 사회사업과 강사로 교편을 잡는 한편, 대한YWCA 총무·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하며 여성운동가로 활동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전쟁통에 부산을 피난했고 그곳에서 친구 김정례 등과 함께 대한여자청년단을 결성했다. 여성의 권익을 찾아주자는 취지의 여성운동에 첫 발을 내딛었으나 군경원호 활동에 치중되자 그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 유학을 떠났고 귀국후에 이화여대 부총장이자 YWCA 회장의 권유로 1959년 YWCA 총무 역할을 맡는다. 첫 번째로 제안한 캠페인이 ‘혼인신고를 합시다’ 였고 이 운동은 축첩 반대 운동과 남녀차별적 내용이 담긴 가족법 개정운동으로 커졌고 훗날 호주제 폐지로까지 이어졌다.

 

여성운동가로 살던 그의 인생행로는 두 살 연하 김대중과 부부의 인연을 맺으며 바뀐다. 자서전 동행에 “그 사람, 김대중은 노모와 어린 두 아들을 거느린 가난한 남자였다. 그 뿐만 아니라 셋방에 앓아누운 여동생도 있었다”며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곧 거세게 노크했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미국 유학을 포함한 이후 여성운동은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모친의 뜻을 스스로 따른 것이었다. 그는 사랑하던 어머니를 18살에 여의고 큰 충격 속에 굳게 다짐한 것이 세 가지 약속이었다고 회고했다. “‘결혼하지 않는다’ ‘건강해야 한다’ ‘공부를 많이 하자’ 그것만이 어머니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 믿어 실천했으나 비혼만은 지키지 못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위협한 뒤 정권의 최대 공적으로 떠오르자 그때부터 이 부부는 온갖 고초에 시달렸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김 전 대통령이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들며 납치·구금·연금이 이어지는 동안, 김 전 대통령에게 이 여사는 배우자·아내를 넘어서는 정치적 동지로 자리잡게 됐다. 1977년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구속되자 이 여사는 1년 가까이 석방투쟁을 벌이는 동시에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맡아야 했다.

 

대통령 당선 직후 여의도에선 ‘김대중 정부 지분 40%는 이 여사 몫’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가 ‘여성운동가’로서 스스로 전문성을 가진 ‘독립적인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장남 홍일씨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공안당국에 끌려가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여생을 고통 속에 보내다 이희호 여사보다 두달 앞선 지난 4월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운 것은 이희호 여사 말년에 지병으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장남 홍일시의 사망 소식도 알지 못햇다고 전해진다. 

 

미국 망명시절 부엌에서 함께 설거지를 하는 모습

 

도쿄 납치 생환미사에 참석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이희호 여사 연대기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장충단공원 유세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1976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이희호 여사

 

대통령 취임식 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주위의 반대와 우려 속에 결혼식을 올린 이희호와 김대중은 그 시절 여느 신혼부부들처럼 충남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