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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춘 별세

어이구야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70년대 이후 안방극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던 코미디언 임희춘 씨가 노환으로 별세 했다. 여든이 넘는 나이에도 30년 전 흑백 TV에서 돌쇠분장을 하고 나와 자신의 유행어로 연극과 뮤지컬에도 모습을 나타냈었다.

 

임희춘 연예계 데뷔

 

광복 이후 서울에 올라와 한남동에서 용산중학교를 다녔어요. 아버지가 공무원이셔서 괜찮게 살았는데 6·25전쟁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죠. 피란 중에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고 형제들과도 헤어졌어요. 졸지에 고아가 됐지요. 구두닦이도 하고 냉차도 만들어 팔고 안 해본 것이 없어요.

 

1952년에 길에서 우연히 광고판을 봤는데 극단 동협에서 ‘피어린 역사’라는 작품의 배우를 모집한다고 해서 바로 지원했죠. 먹고 잘 곳이 해결되는 게 너무 좋았지요. 임희춘은 52년 극단 ‘동협’으로 데뷔해 ‘웃으면 복이 와요’‘유머극장’‘명랑극장’ 등 70~80년대 TV 코미디프로그램을 주름잡던 대표 코미디언이었다. 연극배우로 시작했던 그였기에 코미디언에 대한 멸시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고 한다.

 

당시 연극인들은 대중예술인들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었지. 농담이나 하는 천박한 직업으로 여겼던 거지. 연극 한다고만 해도 ‘딴따라패’니 ‘굿패’니 하며 깎아내리던 시절이었으니까 라며 희극인으로서 운명에 대해 설명을 했다.

 

운명처럼 만난 인연 김희갑

 

당대 최고 스타였던 희극배우 김희갑 씨가 당시 연극을 보러왔다가 그런 임희춘을 보고는 ‘저 놈 한번 키워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뒤 깁희갑 씨와 구봉서 씨를 차례로 만나며 코미디언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그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표현했다.

 

김희갑씨가 팔도강산 해외로케를 한 6개월 나가는데 나를 데려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구봉서씨한테 맡겼지요. 그때 구봉서씨는 잘나가는 초특급이었지요. PD들이 배역을 구봉서씨가 넣으라면 넣고 빼라면 뺐으니까. 구봉서씨 덕분에 배역을 많이 했다며 그의 인생에 빼놓을 수 없었던 두 번째 인물 구봉서에 대한 말을 남겼다.

 

흑백 텔레비전 시대에서 컬러 텔레비전이 안방에 놓이던 시절인 1980년대 까지 임희춘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코미디계에도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사회문화를 문란하게 했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코미디언이 많았다.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이라는 수식어는 그를 무대에서 영화 판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했었다. 그렇게 인기를 끌던 그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어느덧 은퇴를 맞이하게 된다. 1995년 3층짜리 자택의 1층을 사무실로 개조해 노인복지후원회을 열었다. 은퇴 후 자신을 위해 웃어주던 세대를 위해 봉사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던 중 찾아낸 방안이었다.

 

고인이 된 임희춘은 생전 코미디언은 고된 직업입니다. 가수는 한 곡만 히트하면 평생 먹고살 수 있지만 코미디언은 매주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잖아요. 행사를 나가도 꼬박 두 세 시간은 서 있어야 하고, 중간중간 웃겨야 하고, 쉴 수도 없고, 제일 불쌍하죠. 스케줄이 일정치 않으니 그 가족들도 힘들긴 마찬가지라며 후배 코미디언들을 위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향년 8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고인은 인천 연수성당 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되며 발인은 4일 오전 7시30분 장지는 인천가족추모공원이다.